나의 공간과 시간들/Power Social Worker

[스크랩] 건강한 소통이 있는 농촌마을공동체를 꿈꾸다

새빛골 해바라기집 2007. 9. 26. 08:17

건강한 소통이 있는 농촌마을공동체를 꿈꾸다

홍 수 진 | 전남 곡성 하늘나리 마을 사무장

 

3년 전, 꼭 이맘때 즈음이었다. 한층 높아진 가을 하늘에서 쏟아지던 화사한 햇살 덕분에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던 날들. 우연에서 비롯된 곡성에서의 시간이 내 전 생애에 걸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커다란 사건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단지, 한낮의 후끈거리는 아스팔트를 대단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선사하는 도시의 한여름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나온 길이었음에, 그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줄 알았으니까…….


도시에서 나서 28년을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사는 법을 배우며 살던 나에게, 갑자기 그 착실한 치열함을 저버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진지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던 내 시선이었다. 숱한 여행길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을, 지금 와서 생각건대 운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부산에서 인테리어디자인일을 하던 나에게 오래 전부터 가진 여행 습관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낯선 곳들을 그저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것들만 탐닉하던 일은 과히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단지 공간으로서의 도시와 농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벗하여 있는 공간으로서의 농촌과,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며 점점 자연에서는 멀어져 가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단순히 이렇게 시작된 고민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들의 삶과 문화, 가치와 철학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모양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슬펐다. 좋다. 그럼 진짜 내 삶을 살아 보자. 좀더 가치 있고 건강한 내 삶을 살아 보자. 그러면서 곡성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며…….
 

“아이구미, 젊은 큰애기가 부산에서 뭣 헌다고 이로코롬 먼 전라도 땅까지 와서 산디아~.”
“보통 애기 같아 보이진 않는디, 크게 빚이라도 지고 도망온 것 아니여.”

 


 

23가구의 정말 작은 마을. 빈 집 하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늘지도 줄지도 않은 가구 수. 처음 마을로 시집 올 때만 해도 36명 마을 어르신들 모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셨다. 상식적으로 젊은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쌍수를 들어 맞이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저렇게 숙덕거리니 보통 사람이 들어와서 살기가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는 시어머님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분이셨고 새색시가 마을로 들어온 지도 어언 30여 년 전의 일이었으니 생소한 광경이기도 했을 것 같다. 애초에 무슨 큰 뜻을 품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아닌 탓에 이리저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자유로이 찾을 수 있었다.

 

곡성에서도 최고 오지마을로 손꼽히는 이 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이 곳에서, 인생의 방향을 새로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의외로 빨리 왔다. 내가 마을로 들어온 그 시기에 맞춰서 마을의 운명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2004년, 정부지원사업으로 농촌관광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원을 해 주는 쪽도 지원을 받는 쪽도 뚜렷한 생각 없이 무작정 대세에 휩쓸려 가는 모양이 가히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농사를 잘 짓게 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무상지원금을 뿌리더니, 효과를 보지 못했던지 이제는 그 돈으로 관광을 하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농사만으로 소득을 보장 받을 수 없으니 도시 사람들을 불러들여 맛있는 밥도 해 주고, 농사 체험도 시켜 주고, 짬짬이 생산해 내는 농산물도 팔고…… 그렇게 서로 잘 살게 된다는 결론. 이론상으로는 아주 완벽해 보이는 시나리오지만 실상은 너무도 달라 보였다. 잘못하면 그나마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 마을에 큰 분란이 일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2002년부터 태동하기 시작해 5년 가까이 진행되어 오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노하우들 덕분에 지금은 많이 유해져 보이지만, 변화되는 시책만 쫓아가고 스스로의 대안들을 찾지 않으면 안 돼 보였다. 그 와중에 마을일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회적 일자리 창출 명목으로 진행된 ‘마을 사무장 제도’ 덕분에 마을에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마을에서 ‘사무장’이라는 직함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없다. 또한 그 사람의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마을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바로 마을 사무장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 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큰 틀을 그려 보았다. 단순히 마을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농외 소득을 올리는 데 목적을 둘 것이 아니고, 근사한 이론처럼 보이는 ‘농경문화의 보존·계승, 다양의 의미로서의 농촌마을 공동체의 복원, 농촌의 인구 증가, 살기 좋은 농촌 만들기’등을 꼭 한 번 실천해 보리라. 나부터 실천하고 연구해서 조그맣게 시작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교육도 들으러 가고 사람을 만나면서 공부도 시작했지만, 역시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그런 생각의 발로로 “희망고향마을 만들기 첫 번째 프로젝트 - 산골! 그 곳에 도서관이 있었네”가 기획되었다.

30년 전, 마을 어르신들이 지게로 퍼다 올린 모래며 시멘트로 지어진 작은 분교가 10여 년 전 문을 닫고, 급기야는 3년 전 외지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그나마 마을의 교육문화 공간으로서 명목을 유지해 오던 학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공간이 마을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던 어르신들은 지금에 와서야 그저 공간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만 토로하신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학교가 있었을 때 아이들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뛰고 즐겼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떠한 형태로든 교육 공간 하나 없는 시골마을들이 늘어나고 있고(농촌 지역 학원 통폐합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근대 마을의 유일한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학교가 사라짐과 동시에 ‘마을의 공동체성도 점점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어떠한 현상이 발현되면,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나 각기 달리 인식되는 원인에 따라 해결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그런 뜻에서 ‘산골작은도서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첫 번째는 어르신들의 건강한 소통과 배움의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이다. 고된 일로 지치는 농번기나, 술로 세월을 보내는 일밖에 달리 시간 보낼 일이 없는 농한기에 어르신들의 소통과 배움을 위한 정서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이라 믿는다. 두 번째는 마을에 학교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로서의 도서관이다. 아이들이 없으니 당연히 학교는 사라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농촌에 들어와 살고 싶어도 아이들 보낼 수 있는 학교가 없으니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어쩌면 작은 학교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을회관 안에 작은 방을 꾸미고, 800여 권의 책은 전부 기증 받아 갖추어 놓고 보니 그저 드나드는 사람이 주인이고 누군가 지켜 보지 않아도 책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두 번째·세 번째 희망고향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역시,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될 사람들에게도 가슴 설레는 일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서로 건강하게 소통하며 예전 어르신들이 지키고 가꾸셨던 마을공동체를 그리고, 스스로 생동하는 삶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며 말이다.


무슨 사업이든 그렇지만, 특히 정부지원 사업에 있어 단기적 성과는 매우 중요한 척도로 주목된다. 상반기 업무를 마치고 어느 정도 사업의 성격을 파악한 지금, 사실상 대외적인 홍보나 소득 증대 사업은 보류 중이다. 밉건 곱건 정으로 똘똘 묶여 수십 년을 살아오신 마을 어르신들에게, 어쩌면 내가 앞장 서서 욕심과 다툼의 방식을 전파하는 것 같아 몹시 마음이 언짢아지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직 좋은 것을 더욱 좋게 포장하는 기술이 내겐 없다.

 

라다크의 무차별적인 파괴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결국 그 곳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을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글을 읽으며, “농업! 제발 망하게 그냥 내버려 두라”고 외치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글을 읽으며 이 땅의 배우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아직 많이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조용히, 그러면서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쉬지 않고 해야 할 일임을 확신하기에 오늘도 세상의 이야기와 내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월간 이장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 건강한 소통이 있는 농촌마을공동체를 꿈꾸다
글쓴이 : 띠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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